2011/08/26 22:52

1월부터 6월까지 misread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옛 노래를 듣다가, 나의 옛 연인을 처음 울리고만 순간이 생각 났다.
마치 영화처럼,-물론 항상 그렇든 우리 모두의 연애사 하나하나 빠짐없이 그렇겠지만-마치 크리스마스의 늦은 선물처럼, 우리가 사귀기로 한 것은 내가 스물 한살 되던 해 12월 26일의 아침이었다. 해가 뜨는 늦은 아침까지 어색하게 손을 잡고 걷던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지하철을 타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었다.

그녀의 생각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당장에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조금은 서둘렀던 것 같다. 지금까지 누군가와 함께 있기보다는 혼자가 편했기 때문에 그랬다. 갓 만나기 시작한 순간을 포기할 수 있었을 만큼, 오랫동안 이성에 대해서 진지하지 못했던 나에게, 연애의 시작은 진정 큰 변화였던 것이다.

열차가 지상으로 고개를 내밀고 나서부터 몇 정거장 지나자, 점점 비좁아지기 시작했다. 옆에는 그녀가 있었기 때문에 시선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행복했을 것이 분명한 휴일을 뒤로, 또 하루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처럼 밝아서 열차 밖에서 들여다보는 햇빛이 더욱 눈부신 것 같았다.
나의 표정은 그들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나의 그녀가 된 H 또한 어떤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문 쪽으로 고개 돌린 옆모습이,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한 겨울답지 않은 따듯한 빛깔을 내었던 하늘 때문일까.

그날은 평일이었다. 다들 출근하고 있었을 텐데, 우리는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이 재미있는 일 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사람이 너무 많았던 탓에 햇빛으로 찡그린 눈을 한껏 더 찌푸려가며 조금이라도 공간을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지금까지 몇 번의 데이트에서 조차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던 나였다. 사람이 많다거나 하는 핑계도 그때의 순수한 애정에는 가당치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열차가 멈추는 순간 어딘가 헛 디뎠는지 아니면 뒤에서 밀어왔는지 내 품에 안겨왔온 순간, 나에게 무척이나 길었던 연애가 봉우리를 틔웠다. 지금도 난 그것이 우리의 시작일 것이라고 믿는다. 바로 그때 어두컴컴한 술집에서 장난처럼 건네었던 사귀자는 말은 그대로 허공으로 스러져버렸기 때문이다.

며칠 뒤, 우리는 멀리 새해를 알리는 소리를 들으며 입을 맞추고, 처음으로 함께 밤을 지새웠다. 
입맞춤 외에는 서툴렀던 나의 사정이 끝나자 그녀는 울어주었다.
그 귓가에 수많은 맹세를 하던 나를 떠올리면서, 그것을 모두 지켰다면 서로 더 많이 믿으며 오래 오래 사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나는 거짓말을 따로 배운적이 없는데 싶어서 조금은 억울한 마음에 더욱 그런 것일지 모른다. 가끔은 오히려 그 때 그 말들을 아껴두면 어떠했을까 싶어, 아릿한 가슴에 웃기도 하고.

우리는 이듬해 5월의 어느날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금도 H는 그 눈물과 함께 가끔 내 가슴을 때리고 만다.
영원토록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가 치매 혹은 그 비슷한 어떤 몹쓸 병에 걸리거나, 죽거나, 운명의 누군가를 만나 그 자취로 또 다른 아픔을 겪고 그녀를 지울 때 까지, H는 오늘처럼 나를 깊이 상심하게 만들겠지 싶다.

그래도, 손을 잡고 함께 걸었던 길도. 자주 찾던 공원도. 그토록 좋아하던 고깃집과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봐 주었던 국밥 집도. 혹시라도 근처를 지나게 되면 마주칠까 두근거리는 너의 집 앞 골목도.
아니었겠지. 아껴둘 필요 없었겠지. 난 언젠가 다 희미해질 것들을 그리워하게 될 것 같다.

하긴 이것도 이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조금씩 꾸며내기 시작하는 연애 이야기일 뿐.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는 이미 돌만큼 돌아서 잘 팔리지도 않는, 시작하지도 말라고 모두 야유를 보낼 정도로 고리타분한 스토리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한참을 묵혀두었다가 오늘 보아하니, 답답할 정도로 느릿한 시간을 들여가며 잊혀지고 있었나 보다.

거 마음도 편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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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에쓰이 2011/08/27 10:49 # 답글

    아 노래를 듣다가 짠해져버렸네요.
    지난 연애란 참 흔하면서도 늘 후회가 남는 일인 것 같아요…
  • hy_un 2011/08/27 15:06 #

    따지고 보면 같은 일인데, 그 일에 수많은 사람들이 후회를 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 같습니다
  • 0105380 2011/08/28 20:12 # 답글

    추억 그리움이 힘들어요

    시간 지나면 반드시 희미해 지겠죠


    빨리 희미해지길 바라면서도 안잊혀지길 바라는 이중적인 맘가짐으로 지내고있는데..

    애매하네요 참 ㅎㅎ
  • hy_un 2011/08/29 09:28 #

    그럴땐 술을 마십니다
    딱 일 만 잔ㅋㅋ
  • 2011/08/31 00:0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hy_un 2011/08/31 09:01 #

    혼자하는 연애는 없으니까요 ㅎㅎ
    행복했을겁니다
  • 2012/01/16 11:0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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